딸내미랑 백두대간

제 1차 여원재~복성이재

객꾼 2010. 7. 5. 10:52

일시 : 2009. 3. 14~3.15(1박 2일)

    - 1일차 : 정오쯤 여원재 출발~18시경 매요마을 도착. 인월 여관박

    - 2일차 : 08:30 매요출발~15시경 복성이재 당도

 

○ 누구랑 : 희인, 혜인, 희라, 객꾼, 뚜버기     

 

 

이 땅에 백두대간 종주의 바람이 분지 10여년, 마침내 아가들까지 데려가는구나

아마도 그 시발은 뚜버기가 술에 취하여 그 딸들에게  공약을 남발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자기가 그리 약조해 놓고도 어찌 막막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없었겠는가

 

만만한게 홍어 거시기라고,

어느날 객꾼과 산길을 걷다가 불쑥 제안하기를 <딸들과 백두대간을 하자> 한다

산이라면 객꾼이 뒷일을 생각하나

일단 그리해 보자고 약조해 놓았으되 저거매가 동의를 하겠는가가 걱정이다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니 택도없는 말씀마시라는 반응이다

내가 저거 서방인데 처방을 모르겠나

아가들 지리과목 공부하는데는 이것만 한게 없다하니 잠시 눈빛이 바뀌다가

지나는 곳마다 지방의 특산물이나 역사를 공부시키겠다하니 금새 찬성으로 돌아선다

 

뚜버기와 그 큰딸 혜인, 작은딸 혜지, 객꾼과 큰딸네미 희인, 작은딸 희라로 산행팀이 구성된다

한달에 한번, 한번에 산꾼들의 하루 구간을 1박 2일로 나누어 3년을 계획한다

가급적 민박을 하나 여의치 않아 야영을 해야 할 경우도 많으리다

 

산을 가고자 준비하면서 설레이는 마음도 오랫만이다

확실히 백두대간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그걸 대간병이라 했던가

 

일단 그 첫 출정은 여원재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지리산은 통제기간 이려니와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산행을 한다면 십중팔구 질려서 다음부터 아니하겠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삼재에서 여원재까지가 또한 한구간이 되므로 그것도 미루고 그중 산길이 수월한 곳을 찾은 이유다

 

뚜버기가 대전을 지났다는 걸 확인하고 저거매가 준비해준 김밥을 챙겨 출발한다

하필 첫 출정일이 꽃샘추위로 장난아니게 춥다

매요마을에 당도하고 조금 있으려니 뚜버기네가 온다

 

그런데 그 작은딸이 없다

동갑네기 친구가 있다며 희라를 꼬드긴 참인데 낭패로다

아이가 너무 심하게 놀다가 목을 조금 다쳐 마음대로 안돌아가기로 할수없이 두고왔다 한다   

 

매요마을 회관마당은 포장공사 중이다

매요휴게소에도 들러 보았지만 할머니가 아니 계시다

마침 회관안에 할머니들이 쉬고 계시기로 양해를 구해 거실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막걸리를 겻들인 점심을 마친 후 뚜버기차는 매요에 두고 여원재로 이동했다

마침 산악회 버스 두대도 당도하여 산행을 준비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고개 좌우로 주막이 즐비했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객사가 있었다 한다

시방은 그 흔적은 고사하고 이리도 한산한 곳에 무슨 연유로 그런 시설들이 있었을까 의아심마져 든다

다만 인월이 옛 시절에는 아주 중요한 요충지 였는 모양이다

그리되니 자연스레 그리로 통하는 여원재 또한 번화했으리라 



 

 

 

 

 

 

날씨가 그리 추운데도 개의치 않으니 아이들이 일단 산꾼의 끼는 있다

백두대간 종주가 행정기관에도 이해된양 곳곳에 남원시에서 등로를 정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등산화를 신기고 배낭을 하나씩 메게하여 걷는 모습을 쳐다보며 뒤따르자니 한편 귀엽고 우습다

뭘 알고나 예까지 따라와 걷는걸까

한편으로 멋모르는 아이들을 산으로 불러 어먼 고생이나 시키고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여원재에서 작은 동산 하나를 넘어 예전에는 농로를 가로질러 가곤 했다

그게 농사하는 분들에게 약간 미안함이 있었는데 사람들 마음이 다 같은 모양이다

그냥 마을길로 표지기들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요즘은 굳이 마루금을 고집하지 않고 약간 돌아가는가 싶다

아니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임도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일기예보에서는 비온 후 춥고 황사가 심하리라 하여 조망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시야가 청명한 날이다

아마 남쪽으로는 아직 황사바람이 다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 구간은 3번째 걷는 셈이니 길로 헷갈릴 일은 없겠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언제 쉬느냐다

아마도 자기들 배낭속에 가득든 과자의 유혹이 제일 큰 이유이리라

우리조차 바랑안에서 흔들거리는 막걸리내음세를 오래 참고 있지는 못하겠다

대체적으로 이번 구간에서 만나는 묘지들은 그 터가 따뜻하고 좋은곳이 많다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이 아늑하니 참 좋다
암만해도 다음 출정때는 아이들한테 가벼운 스틱 하나씩을 장만해 줘야겠다

아가들하고 가면서 젓가락을 가져가나

앉을 자리를 준비해 가나 쯔쯔..


 

 

 

 

 

 

 

 


혜인이는 요즘 학원을 너무 열심히 다녀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한다

보면 힘들어 하는게 보이는데 꾸욱 참고 묵묵히 따라온다

말수가 적으나 생각이 긍정적이고 인내심이 있다

뚜버기가 딸네미 잘 키우고 있는 셈이다 

 


 

 

 

 

 

 

 

 

고남산정에 다다를수록 산이 제법 가파래진다

우리 아가들은 한번씩 로프가 나타나고 그래야 신바람을 더 낸다

 

 



 

 

 

 

 

 

장수군 방면의 산릉들이다

뾰족한 저 산은 거시기한 이름이 있을법 한데 뚜버기 이리저리 뒤적이드니 무명봉이라 한다

아마도 시방 산경도를 비교해 보니 천황산쯤으로 추정도 될법하다


 

 

 

 

 

 

 

 

높이 846m의 고남산은 예로부터 전쟁의 요충지 였다 한다

고려말 운봉에 주둔한 왜구를 무찌르려 이성계가 천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곳 고남산에 자리잡아 제단을 차려 손수 예복을 입고 팔도강산의 산신령을 불러 일주일간 치성을 드렸다 한다

전장에 임한 장수가 칼창을 갈고 화살이나 만들고 있었다면 이해가 될법한데 기도나 하고 있는게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태조봉이나 제왕봉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여하튼 우리도 안녕기원은 해야제~

<백두산신령님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산 신령님이시여~ 뚜버기와 객꾼이 그 딸들을 데리고 대간을 갑니다~ 부디 굽어살펴 주옵소서~>

일동 4배하다

국태민안도 하도 자주하니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겠다

 

 

 

 

 

 

운봉벌판 뒤로 덕두산과 바래봉 능선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쓰고 있고 그 너머로 지리주능선이 멋드러지게 조망된다

뚜버기 이르기로 이 들판이 황산벌이라 한다

객꾼 생각도 없이 "어~그래? 처음 알았구마" 한다

 

그후, 둘은 막걸리잔 기울이면서 백제와 신라군의 군사배치와 전투상황에 대하여 장황하게 읖조렸다

아가들에게도 황산벌의 유래와 역사적 사실등에 관하여 세세히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아가들이 황산벌 전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시방 확인해 보니 황산벌은 부여의 길목, 충남 연산에 있는 땅이라 한다

결과를 알고보면 저곳이 황산벌일 의문이 무수히 많은데 그땐 왜 생각도 안해봤을까

참으로 둘이 축구짓 한 생각을 하면...

 


 

 

 

 

 

 

 

 

뚜버기가 참으로 배려심이 깊다

혹여나 아가들이 졸린다 하면 잠시 재우려고 이 깔판을 가져 왔단다

쉴때마다 펴랴 다시 접으랴 귀찮을 텐데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런데도 뚜버기 마누라는 부부싸움중에 객꾼을 좀 본받으라 한다는데 그것참~~

 

 

 

 

 

 

 

 

이제 남은길은 비교적 룰루랄라다 

산정에서 충분히 휴식하고 느긋이 출발이다

그런데 아가들이 장난끼가 동했는 갑다

으악새 가지 하나씩을 꺽어들고 칼싸움을 걸어온다

 

한번씩 어릴적 생각을 해 보면 그때는 대나무 하나로 어떻게 하루종일 칼싸움을 하며 싫증도 안내고 놀았을까 싶을때가 있다

거진 고남산을 다 내려올때까지 칼싸움을 하며 내려 왔는데 정말 재밌드라

나중에는 뚜버기까지 가세하여,,아이나 어른이나 쯥쯥,,

 


 

 

 

 

 

 

 

통안재를 지났나 안지났다 하며 정겨운 길을 걸어 오는데 유치재다

유치재에는 6년전에도 표언복교수의 안내글이 붙어 있드니 시방도 붙어있다

대간 7차 중이란다

그 양반은 대간만 하는 모양이다

하긴 대간이 좋긴 좋제~

 

 

 

 

 

 

 

 

 

정오쯤 시작한 산행이 대략 여섯시간쯤에 날머리에 당도한다

오늘까지는 아가들이 불만이 전혀 없다

 


 

 

 

 

 

그때를 회상하며 막걸리라도 한잔 하고 싶건만 할머니가 어데 아들집에라도 가신 모양이다

새벽 4시에 정령치에서 그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출발해 이곳에 오니 정오쯤...

어여가라는 할머니의 채근을 못들은냥 하고 혼자서 막걸리를 4병이나 마시고 복성이재를 목표로 갔는데,,,

그노머 아막성터는 왜그리도 나타나지 않는지...

아막,아막하다가 거진 깨꼬라질뻔 했었드라



 

 

 

 

 

 

다시 여원재로 가 차량을 회수하여 운봉주변을 돌아 숙소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다

그런데 가만 보아하니 어차피 복성이재에 차를 두려면 인월을 지나야 하겠다

인월엔 숙소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으니 금상첨화로다

 

해비치모텔을 4만원에 잡아두고 인근 흑돼지집에 들러 인생을 논하다 돌아와 잠들었다

아침 6시 어김없이 기상하여 방에서 대충 아침을 해결한 후 복성이재에 뚜버기차를 차를 두고 다시 매요마을이다  

 

 

 

 

 

 

 

 

 

아침 차거운 공기로 인하여 아가들이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어슬렁어슬렁 아무리 채근해도 쉬이 따라 붙지를 아니한다

폼들 한번 봐라

참말로~


 

 

 

 

 

 

 

마을에서 작은 동산하나를 지나면 743번 지방도를 만난다

대간길은 가산리 방면의 618고지를 돌아 사치재로 이어진다

그런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 우회로를 왜 두번이나 왔었을적에는 몰랐을까

그냥 743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88고속도로를 고가다리로 통과하여 우틀해 사치한옥마을 지나 쭈욱 올라가니 사치재다


 

 

 

 

 

 

 

 

88고속도로를 지나면 오른쪽 사치한옥마을

 



 

 

 

 

 

사치재 오름길이 아가들이 오르기엔 부담될 정도로 장난아니다

계속 언제 쉬냐를 되풀이 묻는다

겨우 꼬드겨 힘들게 오르니 앞서간 뚜버기가 없다

 

사방팔방으로 불러 제치니 우리가 지나온 쪽에서 기별이 온다

아마도 거름주러 갔었던 모양이다

 

 

 

 

 

 


 

이름도 없는 봉우리이나 그 조망이 사통팔달 막힘없어 시원하기 그지없다

오랜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국태민안한 곳에서는 항시 좋은일만 있었다

뭐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일이 있을거라며 같이 하자니 그래야 되는갑다 여기고 군말없이 따라들 한다

다만, <아빠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에~> 할 따름이다


 

 

 

 

 

 

 

쉬고나니 힘들이 나는 모양이라

다만 희라가 약간 삐진것은 언니들이 둘만 놀아 자기는 심심하다는 게다

뚜버기 작은딸도 왔었드라면 산행이 두배는 재미 있었을 터이다


 

 

 

 

 

 

 

희인이가 우리도 표지기를 달고 가자며 노래를 부르드니 숱제 하나를 주워들드마 그 자리에 엎드려 글을 쓴다

나는 필통을 통째로 들고 산에 온 경우도 처음 봤다

<2009. 3. 15. 희인 혜인 희라 객꾼 뚜버기 왔다감> 그 표시가 우스워 뚜버기와 한참이나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다가 아예 이 안대로 표지기를 만들어 다음산행때 부터는 달고 다니기로 했다


 

 

 

 

 

복성이재까지 이어지는 산길이 작은 오르내리막의 연속이다

익숙하지 않은 이에겐 능히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차츰씩 희인이가 쳐지기 시작한다

 

이 놈은 이게 문제다

분명 체력은 될 터이지만 마음이 나약하다

집에서 출발할 때 이 점에 대하여 단단히 교육을 시켰는데 이게 하루 아침에 고쳐질 일인가

다른 녀석은 몰라도 이 놈은 필히 진부령까지 데리고 가야겠다




 

 

 

반면 요놈은 천하태평이다

희라는 지난 겨울방학을 노느라고 억수로 바쁘게 보냈다 한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의 거진 70%는 자기 전화다

아예 자기방 책상에 전용 전화기를 하나 놔 두었다


 

 

 

 

아주 바쁘게 놀고 지낸 값을 톡톡히 한다

보폭을 남보다 약간 빨리해 저만치 멀어지면 일이십초 앉아 쉰다

따라 붙으면 또 앞서가 그러하니 체력이 점점 차이가 날 밖에..

 

이 놈은 확실히 산꾼의 기질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담아 자기 배낭에 간수하는 거 하며

산을 즐기며 걷는 거 하며  


 

 

 

 

 


팔불출이 같은 소리 하고 있지만 희라는 성격이 참 좋다 

이놈 첫번째 꿈이 의사가 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게 안되면 의사각시가 되는 것이란다


 

 

 

 

 

 

 

 

멀리로 봉화산이 멋드러지게 조망되고 앞으로 아막성이 보인다


 

 

 

 

 

 

 

 

뚜버기가 개기는 병사들 데리고 온다고 욕본다

원래 넉살이야 좋다지만 우리 희인이한테 한번 당해보면 에~또,,,


 

 

 

 

 

 

 

드뎌 아막성에 도착~

 

옛날 백제군과 신라군이 여기서 치열하게 전투를 했다하니 듣고있던 희인이 왈~

"뭐하러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와 싸워? 그냥 올라가면 가만 놔두면 되지~"

그러게 말이다

가만 놔두면 결국 내려 올건데 밑에서 편히 쉬며 기다렸다가 그때 싸우면 되지


 

 

 

 

 

요즘 해동기간이라 산길이 미끄러운 데가 많다

희라와 앞서서 내려 오는데 한번 심하게 엉덩방아를 찧는다

보기만 해도 제법 아플터인데 잽싸게 일어나며, "아이고 엉덩이 아파라~, 아빠 이거 비밀이다이~"

자빠진거 남들이 알면 쪽발리단다

지가 무슨 이순신장군이라고

 

나중에 뚜버기 따라와 희라엉덩이를 보고 한번 자빠졌나고 묻는다

곧바로 수긍모드로 들어가드만 또다시 비밀을 지키라 당부한다

글쎄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알고, 그기다 뚜버기까지 알아 버렸음이랴

항차 다섯이 알고 있는게 지켜진 비밀이 동서고금에 있었던가 





 

 

아막성 북면에서 좌틀하여 다시 대간길이다

좀 더 여유로울 수 있다면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있는 운적암에 들러 스님과 잠시 해포라도 풀고 오련만...

그때 대간길에 들러 하룻밤 쉬어가는데 육신이 피곤하여 어여 눕고 싶은데 외로운 스님이 어찌나 끝도없이 이야기를 하시는지..

 

그런데 이 사진 너무 생동감이 있다

오늘의 대상에 임명하노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오늘 산행이 끝난다며 힘을 복돋운다

그때 너희들 내려가서 무얼 먹고싶냐 이렇게 꼬드겼어야 하는데....


 

 

 

 

 

 

 

 

옛복성이재에 가드만 그냥 어거지를 피우기 시작 한다

30분만 더 가면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드디어 우려했던 말, <다음에는 안온다>까지 나왔다

 

 

 

 

 

 

 

 

뚜버기가 알아서 꼬드겨 오겠지

그냥 희라만 데리고 출발이다

돌아보니 도로 돌아갈 태세다

참으로 아이들의 판단력을 보면, 조금 나아가면 될 경우에 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까


 

 

 

 

 

 

제놈들이 별 수 있나

기다리고 있으려니 입이 남산만 해 가지고 도착한다

<그날 복성이재 도착하여 희인이 눈물 찔찔 짰음을 기록으로 남김>

 


 

 

 

 

 

우쨌거나 1차 산행을 무사히 마친 기념한장~

다음 산행구간은 1일차 복성이재~봉화산~중재로 하고 백운산장에 들러 1박후,

2일차 뚜버기와 무령고개로 가서 내차를 두고,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 뚜버기차는 그곳에 두고 산장주에게 중재까지 택배 부탁하여, 중재~백운산~영취산~무령고개로 할 예정이다  


 

 

 

 

 

뚜버기차로 매요마을로 이동 중 뚜버기와 번갈아 가며 희인이에게 좋은말을 들려 주었다

마음을 즐겁게 가지라는 둥, 포기하는 마음을 참아내라는 둥,

아무말이 없기로 우리 이야기를 수긍하는 뜻으로 알았는데 되돌아 보니 수면삼매에 빠져 있다

 

뭐여~

그럼 이제껏 뚜버기와 허공에 대고 이야기 한거여

둘이 마주보고 멋적게 한참이나 웃었다



 

 

 

 

 

 

 

 

아가들은 왜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걸까

다시 인월로 들어와 짜장면에 탕수육 한그릇, 맥주 두어병으로 목을 축이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서울로 진주로 향했다